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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30년, 새로운 30년을 계획하고 있죠"

'유망직종' 확신 갖고 창업 시니어 늘면서 고객도 증가 두 아들 합류 새로운 도약 유명 인사들도 많이 찾아 보청기 비즈니스만 올해로 꼭 29년째다. 이민생활 초반, 미래의 유망 직업으로 선택해 시작한 사업이다. 지금은 청각전문의 과정을 이수한 두 아들이 합류해 3부자 가업으로 성장했으니, 분명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 사이 아버지 신준근(73) 원장이 내다 걸었던 올림픽길 LA본점의 '신보청기' 간판은 '신보청기 전문'으로 바뀌었다. 아버지가 탄탄하게 닦은 길에 두 아들이 아스팔트 고속도로를 깔았다고 할까. 신 원장은 가든그로브에도 지점을 두고 23년 째 운영하고 있다. LA점은 큰아들 제임스(43), 가든그로브점은 둘째인 존(40)이 나란히 부원장으로 실질적 운영을 맡고 있다. 제임스 부원장은 UC어바인에서 생물학을 공부했고 노스웨스턴대 대학원에서 청각전문의 과정을 전공했다. 존 부원장도 UC샌디에이고에서 생물학을 전공했으며 캘스테이트 롱비치에서 청각전문의 과정을 수료했다. 제임스 부원장은 지난 2000년 청각전문의(Audiologist) 라이선스를 획득해 판매 및 제작 중심의 '신보청기'가 청각 검사부터 진단과 진단에 기초한 보청기 처방까지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한 '신보청기 전문'으로 사업을 확대하도록 했다. 1978년 LA로 가족 이민한 신 원장은 원래 일렉트리컬 엔지니어였다. 한국에서는 초창기 전자손목시계 오트론 출시로 주목받은 올림푸스전자에서 근무했다. 여느 이민자들처럼 신 원장도 변변한 일자리를 잡기가 어려웠다. 전공을 살려 미쓰비시 TV사업부에서도 일을 해 봤지만 그렇게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늘 미래에 유망한 직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날 UCLA에서 미래의 직업을 소개하는 세미나가 열렸어요. 솔깃해서 찾아갔더니, 강연자가 몇 가지 직업을 소개했어요. 인간수명이 늘면서 노인과 관계된 헬스케어, 그 중에서도 난청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될 것이고 보청기 사용이 크게 늘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지요. 보청기가 전자계통이라 해 볼만 하다는 생각도 했고요." 결심이 서자, 신 원장은 캘스테이트 롱비치에 등록해 관련 공부를 했고, 1987년 의료용 보청기 조제 및 판매 라이선스를 획득했다. 이듬해에는 지금의 사업장 자리에 LA점을 냈고, 1994년에는 가든그로브에 지점까지 내면서 왕성하게 일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업이 잘 된 것은 아니다. 보청기에 대한 인식이 낮아 판매가 많지 않았던 것. 당시 사업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아내 린 신(70)씨였다. "남편이 보청기 사업에 관심을 두고 있을 때 LA타임스에 구인광고가 났었요. 마침 보청기 제조업체 시멘스에서 사람을 뽑았죠." 린 신씨는 시멘스에 다니면서 익힌 보청기 수리 기술로 외국인 고객들이 맡기는 보청기를 싸고 빠르게 고쳐줬고, 차츰 고객이 늘어 오늘날 사업체가 자리를 잡는 데 큰 힘이 됐다. 시멘스에서 수퍼바이저로까지 진급했던 신씨는 지금도 LA점 리셉션 데스크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며 시니어 고객의 '말동무'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 때만 해도 한인타운에 보청기를 파는 곳이 없었어요. 당시엔 난청을 무슨 큰 질병으로 여기던 시절이기도 했어요. 웬만큼 안들려서는 보청기를 쓰려고들 안했지요. 사실, 한인들만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미 주류사회도 보청기 착용은 드물었죠." 그런데, 보청기가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인식이 크게 바뀌는 계기가 있었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소형 전자보청기를 착용한다는 사실을 공표하고 관련 사진이 보도되면서 난청 문제에 대한 이슈가 부각됐다. 그로 인해 그해에만 보청기 업계는 20%의 판매 성장이 있었다. "레이건에 앞서 포드 대통령도 사용했고, 이후 조지 부시, 빌 클린턴 대통령도 보청기를 꼈지만 레이건 대통령 이야기가 화제가 되면서 보청기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됐지요." 보청기 사업을 하면서 신 원장은 유명인사도 많이 만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 삼영화학, 신동아그룹, 대한방적 등 한국의 대기업 회장들을 손님으로 맞았다. "보청기에 대한 인식이 미국에서도 낮았던 때라 한국에서는 더더욱 쓸만한 보청기를 만나기 어렵던 때였죠. 1994년이었다. 당시엔 대통령이 아니었지만 고인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함께 방문했고, 두 분 모두에서 보청기를 2세트씩 해드렸다는 게 신 원장의 회상이다. 지금도 LA본점 사무실에는 신 원장 부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와 함께 직은 사진이 액자에 담겨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신 원장은 한국에서 온 신부님을 고객으로 맞았던 게 인연이 돼, 지난 90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두 차례 서울 명동성당에 들러 청각장애인돕기 행사도 지켜오고 있다. 신 원장 부부가 천주교 신자가 된 계기이기도 하다. 신 원장은 "보청기를 껴본 후 목사 설교가 잘 들리고, 드라마를 재미있게 볼 수 있게 돼 너무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는 정말 보람을 느낀다"며 행복한 표정이다. "두 아들이 애비의 선택을 믿고 군말 없이 청각전문의 공부를 하고 사업체 운영도 이제 사실상 다 끌어가다시피하고 있어 고맙게 느낀다"는 신 원장은 "친절하게 고객을 대하고 정직하게 사업을 한다면 아들 대에서도 보청기 사업은 여전히 보람있는 비즈니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리를 찾아주는 일에 보람과 만족" 때론 친구같은 3부자의 동행 신준근 원장은 지금도 1년에 한 번은 꼭 두 아들과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직무교육 세미나에 참석한다. 라이선스를 유지하려면 매년 20시간의 직무교육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맏아들 제임스 부원장이 신 원장을 모시고 가든그로로 지점으로 가서 3부자가 자동차 여행에 나선다. 세미나는 보통 2박3일 정도 열리기 때문에 3부자는 현지 호텔에서의 숙박과 오가는 여행길 내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가족 얘기, 신제품 보청기와 환자 얘기 등으로 참 많은 대화를 하게 되지요. 가끔 호텔 방에서는 3부자가 술도 한 잔 합니다." 어머니 린 신씨는 "3부자가 친구 같을 때가 있다"며 살짝 부러워한다. 스트레스가 없을 수는 없다. 시니어 고객들로 인해 제임스 부원장의 받는 스트레스가 크다. "대부분 70세 넘은 고객들이라 아무리 설명해도 금방 잊어버릴 때가 많아요. 방금 얘기한 것을 이해할 때까지 계속 반복해야 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제임스 부원장은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들려주는 소중한 일을 하고 있어 만족하다고 말한다. "동생도 그랬지만 청각전문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어쩌면 아버지 선택이 훌륭했던 것이었겠죠." 스마트폰이나 이어폰(헤드폰) 사용이 늘고, 자동차 운전이나 콘서트 관람 기회도 많아지면서 난청 환자도 예전보다 많이 늘고 있다. 이에 대해 제임스 부원장은 "지속해서 듣는 세탁기 소리만으로도 청각장애가 올 수 있다"며 "반복하는 소음에는 이어 플러그를 사용하고 지나친 소음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2017-10-09

"저도 아들도 한약재 냄새 맡고 자랐죠"

아버지 등 '한의사 패밀리' 아들 치료하기 위해 도전 "어느새 동행… 행복해요" 친정 아버지와 아들까지. 3대째 가업을 잇는 한의원이 있다. LA한인타운 6가와 아드모어 애비뉴가 만나는 곳의 LA메디컬센터 3층에 자리 잡은 영선한의원이다. 이선례 원장이 운영하는 영선한의원은 지금의 자리에서만 20년, 웨스턴길 동양선교교회 인근에서까지 더하면 올해로 꼭 30년 째 같은 이름으로 고객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원장의 부친은 한국에서 한의원을 운영했다. 지금은 이 원장의 올케가 맡아 하고 있다. 이 원장은 친정 아버지가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한의학 공부를 위해 중국과 일본에도 유학했다고 소개했다.1남 5녀 중 딸로는 셋째인 이 원장의 맏언니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의사로 일 하고 있으니 한의사 가족이다. 이 원장은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운영하는 한의원에서 잔심부름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한약을 포장하고 쓰고 난 침도 정리하면서 그야말로 어깨 너머로 많은 것을 봤지요. 그런 경험과 분위기가 저와 제 아들까지 한의사로 일하게 만든 또 다른 배경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 원장이 미국에서 뒤늦게 한의사 공부를 하고 30년 외길을 걷게 된 데는 그동안 가슴 깊이 묻어뒀던 뭉클한 사연이 있다. "아들(해리 이)이 지금은 키가 6피트나 될 정도로 훌쩍 컸고, 벌써 5년 째 어엿한 한의사로 가업을 잇고 있으니 정말 감사할 뿐이죠." 1984년 LA 이민 길에 오른 이 원장에겐 절박함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행동발달장애가 있는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 고쳐주고 싶다는 희망이었다. "친정 아버지가 약사이고 한의사였잖아요. 아버지도 손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요. 침도 놓고 한약도 짓고. 하지만, 차도가 금방 생길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었지요. 애는 점점 커가고 …. 아무래도 아들을 키우기에는 미국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양의도 한의도 고치지 못한 아들의 병. 이 원장은 인생을 걸고 아들을 직접 고치겠다는 다짐했다고 한다. "엄마니까, 그러니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미국에 온 이 원장은 뒤늦게 한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학비에 생활비까지 마련해야 하는 어려운 도전이었다. "한국에서 다이어트 약이나 건강보조식품 등을 들여다 팔았어요. 친정 도움도 좀 받고 미국에 오기 전까지 아버지 한의원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어 도움이 됐지요." 그래도 공부는 쉽지 않았다. "애 돌보고 생활비 마련하고 밤에는 한의학 공부하고, 돌이켜 보면 그걸 다 어떻게 해냈나 싶네요. 사는 것도 힘들고 공부는 더 힘들고.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새벽에 옆집에 들릴까봐 물을 틀어 놓고 울기도 참 많이 했지요. 절절하게 기도도 많이 했어요. 한바탕 그런 소란을 떨고 나면 공부가 기가 막히게 되더라고요. 신기하죠." 아들 때문에 학교도 많이 빠졌고 어렵게 공부했지만 한의사 시험은 한 번에 보란 듯이 붙었다. 한의사 자격증을 딴 후 이 원장은 한의원을 열고 본격적으로 아들 치료에 매달렸다. 침도 놓고 약도 지어서 먹이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성을 다했다고 했다. "좋은 약이란 약은 다 먹인 것 같아요. 그 덕인지 키도 훌쩍 컸고, 팔.다리 마비증상도 사려졌어요. 아직 말이 조금 어늘한 구석이 있지만 95% 이상 정상활동이 가능해요." 해리 이 한의사는 결혼도 했고 2명의 자녀도 뒀다. "며느리가 너무 착해요. 게다가 변호사이기도 해요." 이 원장 표정에는 아픔을 털어낸 행복함이 스친다. 물론, 초보 한의사가 하루 아침에 베테랑이 될 수는 없었다. "처음엔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실력이 안 되나보다'하고 포기할 생각도 몇 번이나 했어요." 이 원장은 자신의 몸에 직접 침을 놓으며 환자의 고통을 느끼고 효능을 체크하는 방법까지 썼다고 했다. 고혈압, 당뇨, 관절통, 신경통, 목디스크, 갑상선, 피부병 등, 환자 치료에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유사 사례를 연구하고 한의 서적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으며, 치료법을 찾는 노력을 했다. "돈을 얼마나 내더라도 병을 고치겠다고 온 사람들인데 한의원 문을 나설 때는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떳떳하게 돈도 받을 수 있는 거고요." "이 원장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환자를 맞는 생각은 마찬가지라고 했고, 아들에게도 강조하는 말이라고 했다. 환자 치료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이 원장은 많은 병이 비만에서 비롯된 점에 주목했다. "당뇨나 심장비대증, 무릎이나 발목 관절통 등이 살이 찐데서 오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 많은 질병 중 50%는 살만 빼도 고칠 수 있는 것들이죠." 이 원장이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한방비법으로 지방분해, 체질개선 등에 효과적인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거운 체중 때문에 다리가 저리고 고혈압, 당뇨병, 혈행장애 등의 증상이 오는데, 침과 한약으로 잘만 다스리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어요." 이 원장은 환자들에게는 무엇보다 건강한 식단과 소식, 그리고 규칙적인 운동을 할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어려울 때만 어머니에게 도움 청해요" 한의사 모자의 ‘분업’ 한의사가 된 엄마는 처음부터 아들이 가업을 잇기를 바랬다. 아들이 알게 모르게 친구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수없이 본 탓에 나중에라도 자립해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고 싶은 탓이었다. 이선례 원장은 아들이 고등학생 때부터 직장생활을 하도록 했다. 보험회사에서 빌링 스테이트먼트 작성하는 것을 배우게도 했고, 병원이나 교회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보험회사에서 일을 시킨 것은 나중에 영선한의원에서 일을 하더라도 기본적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지요." 다행히 아들도 엄마 말을 잘 따라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곧바로 한의사 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장학생으로 입학한 UCLA에서는 사회학을 전공했다. 이후 아들은 카이로프랙틱을 공부하겠다고 했다. 성인이 된 후로는 이 원장도 아들의 뜻을 존중했다. 그런데 6개월 정도 지난 후 한의사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환자를 금방 치료하는 모습을 몇 차례 본 후 한의학이 더 매력적이라며 전과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사우스베일로 한의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해리는 5년 전 한의사 자격증을 땄고, 마침내 영선한의원에서 이 원장과 나란히 한의사로 근무하고 있다. 해리 한의사는 영선한의원에 별도 진료실을 운영 중이다. 어려울 때는 어머니 조언을 구하지만 그만큼 한의사로서 자신감도 넘친다. 해리 한의사의 고객은 주로 젊은층이고 타인종들이다. 한인 환자가 대부분인 이 원장과 업무 분화가 잘 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아팠고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환자 심리는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빨리 낫게 하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2017-10-01

"제 집념과 아들의 열정으로 만듭니다"

90년대 중반 냉동에서 출발 금융위기 이후 자체 브랜드 글로벌 기업도 기술력 인정 스마트폰으로 작동 제품도 '쿨마트'는 에어컨 브랜드다. LA 한인 사업가 송기덕(62) 사장이 만들어 전국으로 유통하고 있다. 삼성이나 LG, 굿맨, 다이킨 등 글로벌 브랜드에 살짝 가려있지만 성능이나 품질은 업계에서도 인정하는 제품이다. LA한인타운 피코 불러바드와 사우스 벌링턴 애비뉴가 만나는 곳에 쿨마트 매장이 있다. 쿨마트 전시장에는 LG, 굿맨, 다이킨 등 타사 제품도 있다. 에어컨 양판점도 아니고 자체 브랜드를 파는 기업에 경쟁 업체가 전국 유통을 맡기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더구나 LG와 굿맨 제품은 전국 유통 자격까지 갖췄다. "쿨마트는 기술력이 장점입니다. 솔직히 대기업에 비해 마케팅이 안 돼서 그렇지 규격이나 안전, 효율성 면에서 경쟁사 제품에 절대 뒤지지 않아요." 쿨마트 에어컨의 성공에는 '에어컨의 달인'이라고 자부하는 송 사장의 집념이 스며있다. 1992년 LA로 이민 온 송 사장은 '냉동기술을 익히는 것이 좋다'는 주변의 권유로 관련 업체에 취직했다. 한국에 있을 때 전자제품업체인 동남샤프, 아남TV 등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전자제품 취급에 나름 자신도 있던 터였다. 냉동기술을 익힌 송 사장은 4년 뒤 '글로벌 냉동'이라는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수산물업체나 마켓 등에 필요한 대형 냉동설비를 제작해 주는 컨트랙터였다. "오션프레시, 아씨마켓, 태광아메리카 등의 냉동설비를 직접 했어요. 사업이 번창하면서 같은 계통인 에어컨 설치와 판매도 겸했지요. 그때가 2006년이었고 상호명도 쿨마트로 바꿨어요."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부동산 거품이 터지면서 건축경기가 완전히 사그러 들었잖아요. 냉동설비 사업도 정말 힘들었죠. 그때 보니까, 그래도 에어컨 판매는 괜찮더라고요. 자체 브랜드 론칭을 결심한 것도 그때지요, 그 후로 냉동은 접고 에어컨 사업에 올인하게 됐지요." 쉬운 것은 없었다. "단순히 팔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설치도 해주고 고장나면 고쳐주기도 해야하고, 고객문의가 오면 자세히 설명도 해야 해요." 송 사장은 에어컨을 수 없이 뜯어 보고 원리를 이해하면서 하나씩 기술을 익혔다. 에어컨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쌓이면서 송 사장은 자체 브랜드에 욕심을 냈다. 제품은 중국과 한국에서 만들어 올 수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안전성과 효율성을 공인받아야 판매가 가능했다. 송 사장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제품인증업기관인 인터텍이나 AHRI(Air-Conditioning, Heating And Refrigeration Institute) 등에서 국제인증마크를 획득할 수 있었다. 전시장 내 쿨마트 제품을 포장한 박스에는 인터텍이 인증한 ETL( Electrical Testing Lab) 마크와 AHRI가 보증한 에너지 효율성 마크 SEER(Seasonal Efficiency Ratio)이 선명하다. 송 사장은 쿨마트 기술력이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3년 전에는 중국의 5대 에어컨 제조업체 중 하나인 치고(CHIGO)와도 기술제휴를 했을 정도"라는 게 송 사장의 자랑이다. 쿨마트 에어컨을 브랜드화 하고 판매망을 넓히는 데는 매니저로 일하는 아들 앤드루(37)의 역할도 컸다. 2008년부터 쿨마트에 합류한 앤드루는 회계는 물론 마케팅 영역을 넓히는 데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기계에 대한 이해도 빠르고 손재주도 좋아 C-20(에어컨) 라이선스도 갖췄다. 쿨마트가 많이 취급하는 브랜드는 LG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쿨마트 판매 비중도 크게 늘었다. 쿨마트의 기술이나 판매력이 잘 알려져 있기에 굿맨이나 다이킨이 제품 판매를 먼저 요청해 왔고, 매장에 경쟁사 브랜드가 나란히 전시된 이유였다. 쿨마트는 그동안 6번이나 신제품을 출시했다. 그 때마다 최신 기술과 디자인 변경을 했다. 그런 변화는 송 사장 못지 않은 앤드루 매니저의 열정이 작용했다. "아들은 최고제품을 만들자고 해요. 현재 쿨마트 제품에 와이파이 기술을 적용해 스마트폰으로도 작동 가능하게 된 이유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비용이 엄청나죠. 경영도 생각해 가면서 해야 하잖아요. 아들하고 함께 일하면서 모든 게 다 좋은데, 그런 일로 충돌할 때가 가끔 있어요." 하지만 아들을 보는 송 사장의 표정엔 흐뭇함이 뭍어난다. 가업을 이을 만큼 훌쩍 커버린 아들이 대견스러운 탓이리라. 남다른 '손재주'가 닮은 꼴 '업계 최고' 꿈꾸는 부자 아버지와 아들은 발가락만 닮은 게 아니다. 손재주도 닮았다. "아들이 어렸을 때, 자동차, 기차, 포크레인 등을 많이 사줬어요, 그런데, 회사만 갔다오면 전부 분해돼 있는 거예요. 분해는 어떻게 잘했는데, 조립을 못 해 끙끙 매고 있는 거였어요. 그럴 때마다 아들과 공구를 이용해 조립하는 게 아마도 퇴근 후 일상의 큰 부분이었을 겁니다." 송기덕 사장과 앤드루 매니저는 이제, 에어컨을 장난감 다루 듯 한다.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에게 좋은 품질의 에어컨을 소개할지를 고민한다. 물론, 앤드루 매니저도 처음부터 아버지 사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 액세서리 판매도 해보고 LA타임스 고객센터의 이중언어 종사자로도 근무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2008년 송 사장이 다리 부상으로 1년 이상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사업체 관리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막연히, 언젠가는 쿨마트 일을 하겠구나라고 생갹은 했었어요. 그런데 갑작스럽게 일을 하게 되면서 마음을 바꿨지요. 기왕이면 아버지처럼 에어컨 분야에서만큼은 '최고'가 되자고요." 10년 가까이 에어컨 일에 매진한 앤드루 매니저는 이제 웬만한 에어컨은 소리만 들어도 어떤 문제가 있는지 대부분은 알 수 있다고 했다. 이제, 앤드루 매니저는 전국적인 디스트리뷰터 모임에도 아버지를 대신해 참석한다. 그런데 그런 모임에 가면 60대 후반 이상의 백인 남성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나 같은 젊은 세대는 없어요. 냉동설비나 플러밍, 건축 등은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예 찾아볼 수 없을 줄은 몰랐어요." 앤드루 매니저는 업계 가업을 잇는 젊은 사람은 없지만 괜찮다고 했다. 1세대 경영 노하우는 아버지로부터 배우고 온라인 거래 등 컴퓨터를 활용한 사업 확대를 자신이 잘 해내면 쿨마트도 얼마든 지 업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2017-09-24

"가족 비즈니스의 장점은 역할분담이죠"

LA와 OC 3곳에 대형 매장 전문 연주가·유명인도 단골 전국적인 '톱 딜로' 손꼽혀 두 아들이 판매-관리 담당 넓고 깨끗한 매장. 사방에 피아노다. 어림잡아도 수백 대는 된다. 그랜드, 업라이트, 디지털. 크기가 다르고 모양도 제각각이다. 덮개가 열려 흰색 건반을 드러낸 것은 금방이라도 소리를 토해낼 듯 하다. 그런 피아노를 마냥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김스 피아노' 김창달 사장이다. 그에게 피아노는 삶이고 운명이다. "약관에 만나서 반평생을 의지했고 지금은 형제와 자식까지 피아노 때문에 살고 있으니 왜 그렇지 않겠어요." 김스 피아노는 스탠턴시 비치 불러바드와 스타 로드가 만나는 곳의 본사 매장을 비롯해 가든그로브와 인더스트리에도 매장이 있다. 2012년 오픈한 스탠턴 스토어는 1만5000스퀘어피트이고, 가든그로브와 인더스트리 매장도 5000스퀘어피트 가량 되니 전체 쇼룸만 2만5000스퀘어피트는 된다. 매장 3곳에 진열된 피아노와 창고에 쌓인 것까지 더하면 400~500대 쯤 된다니 엄청나다. 플래그십인 스탠턴 매장에는 300석 규모의 콘서트홀까지 갖춰져 있다. 김 사장은 업계 최대 수준의 쇼룸과 인벤토리로 전국에서 피아노를 가장 많이 파는 업소 중 하나라고 말한다. 특히, 일제 가와이 판매는 전 미주 넘버원 딜러로 최근 8년 연속 톱 딜러상을 수상했다. 독일제 브루트너와 한국 삼익악기의 자일러 톱 딜러상도 받았다는 게 김 사장의 자랑이다. 김스 피아노에는 세계적 브랜드인 스타인웨이, 뵈젠도르퍼, 에스토니아, 야마하, 볼드윈 등의 신제품은 물론 리빌트, 중고품이 망라돼 있다. 전문 연주자와 할리우드 셀럽, 유명기업 임원, 학생, 음악교사들의 발길을 잦다고 한다. 김 사장은 자신의 피아노 사업을 '천직'이라고 강조한다. 음악 쪽으로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이란다. 김 사장이 말하는 재능은 '절대음감'이다. 기준 소리의 도움 없이도 여러 소리를 직접 인식해 음 이름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다. 1945년 생으로 충남 대전이 고향인 김 사장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생 때 다리가 떨어져 나간 밥상을 가지고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를 만들었어요. 평평한 밥상 위에 장기알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해 못을 박고 그 위로 '삐삐선(군용 통신선)'을 두 줄씩 늘어트려 완성했는데, 제법 소리가 괜찮았지요. 지금 생각하면 2옥타브쯤 소리를 낸 듯해요." 김 사장은 자신이 만든 '밥상 거문고'로 '나비야' '송아지' 등을 연주하며 놀았다고 했다. 위로 누나 3명이 있고 남자 5형제 중 둘째인 김 사장이 피아노를 처음 만난 것은 23살 때 서울에 살던 큰 누나가 우연히 일본인 피아노 조율사를 소개한 게 계기가 됐다. "누나는 내 음악 재능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자리를 만들어 줬던 것인데, 그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지요.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 정도였으니, 일본인 조율사도 깜짝 놀랐지요. 그렇게 해서 1년간 조율 기능을 배워 테크니션이 됐어요. 당시는 웬만한 호텔이나 살롱에는 피아노가 있었던 만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요." 1987년 이민오기 전까지 서울 낙원상가에서 피아노 판매상을 한 김 사장은 먼저 미국에 와 있던 바로 아랫동생 소개로 LA에 정착했다. 그 동생이 LA에서 유명했던 이병일 피아노에서 조율사로 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3년간 조율사로 일하면서 1991년 가든그로브 가와이 대리점을 인수했고 피아노 사업에 뛰어들었다. "절대음감 재능이 어디서 왔는지는 몰라요. 부모님은 아니었고 아마도 선조 중 누군가는 그런 능력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나만이 아니고 셋째, 넷째 남동생도 비슷한 재능이 있어요. 넷째는 골프 티칭프로를 하다가 8년 전 조율 공부를 시작했는데, 금방 따라잡더라고요." 김스 피아노는 패밀리 비즈니스다. 김 사장 3형제와 두 아들이 함께 일한다. 김 사장 형제는 테크니션으로 활동하고, 큰아들 벤자민(43)과 막내 조나단(41)은 매니저로 가업 승계를 준비 중이다. 김 사장처럼 절대음감을 지닌 벤자민 매니저는 세일즈를 총괄한다. 김스 피아노가 10년 가깝게 가와이 톱 딜러상을 수상한 것도 큰아들 덕이라는 게 김 사장의 말이다. "두 아들이 조금 달라요. 큰애는 절대음감이 있는데, 작은아들한테는 유전되지 않았더라고요. 대신 작은아들은 세밀한 편이라 인벤토리나 관리업무 등을 지원하고 있지요. 어쨌거나 비즈니스 궁합은 잘 맞으니 다행이죠." 김스 피아노에 합류한 지 벌써 20년 가까운 벤자민 매니저는 "부모님이 열심히 일해 일군 사업체다. 이미 최고 수준의 피아노 매장이지만 좀 더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펼쳐, 전국 최고의 딜러로 키우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끔 의견 충돌 있지만 합으로 결말" '절대음감' 부자의 조화 김창달 사장은 요즘 피아노 연주에 푹 빠져 있다. 큰아들 벤자민 매니저가 세일즈를 잘 해주고 있어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 김 사장은 지난 1월 애너하임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열린 '김포 청소년 오케스트라 초청 설맞이 동포 음악의 밤'에서도 연주 실력을 뽐냈다. 몇 년 전부터 스탠턴 매장 콘서트홀에서 봄.가을로 교인과 지인들을 초청한 개인 콘서트를 열고 있지만, 중앙무대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고엽과 찬양 메들리를 악보 없이 연주했고 앵콜곡으로 만남을 연주했는데 반응이 참 좋았다고 한다. 김 사장은 오는 24일 실비치 레저월드타운에서 또 한 번 연주에 나선다. 24일 행사 때는 김 사장이 애정을 쏟고 있는 영 피아니스트 육성 장학금도 전달할 계획이다. 피아노 연주는 벤자민 매니저의 세일즈 특기이기도 하다. "피아노를 특별히 배우지 않았지만, 그 소리를 너무 좋아해요. 한 두번 들으면 자연스럽게 그 멜로디를 찾아 연주를 할 수 있기도 하고요." "벤자민이 피아노에 대해 설명하고 가볍게 연주를 하면 많은 손님들이 그 감성과 소리에 반하곤 한다"는 게 김 사장의 설명이다. 피아노로는 부자가 통해도 사업상으로는 가끔 충돌(?)도 생긴다. "아버지는 보수적이세요. 하지만, 저는 투자나 마케팅면에서 공격적인 편이죠. 그런 일로 부딪칠 때가 있어요. 그래도 아버지가 설립한 곳이고 패밀리가 관여하는 만큼 협의해 진행하려고 해요."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2017-09-17

"엄마와 남매, 셋이 뭉치면 최고 로펌 될 것"

엄마와 남매 3명이 변호사 아들 합류 업무 분야 확대 아직은 경험 더 쌓는 시기 "의로인 입장 살피라고 조언" 제인 정 변호사가 LA한인타운에 '제인 정 법률사무소(Law Offices Of Jane Chung)'를 오픈한 것은 올해로 13년 째다. 그동안 최고의 법률서비스를 위해 노력한 덕에 나름 성공의 길을 걷고 있고, 커뮤니티 봉사에도 많이 참여했다.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다. 다행히 로펌 운영에는 더욱 탄력이 붙을 것 같다. 1남1녀의 자녀들이 차례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같은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CPA(공인회계사) 자격증도 있는 아들 에릭(31)은 3년 전부터 합류해 비중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변호사 자격을 획득한 막내딸 미셸(25)은 아직 로펌에 합류하지 않았다. 더 많은 경험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가주 공정고용 및 주택국 변호사 일을 좀 더 하고 싶어한다. 정 변호사도 당장은 미셸의 로펌 합류를 권유할 생각이 없다. 남매가 안팎에서 충분한 경력을 쌓아 함께 로펌을 이끈다면 자신이 은퇴한 후에도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 변호사는 남매가 공부를 곧잘 했지만 둘 다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변호사를 한다는 게 성격이 좀 맞아야 돼요. 꼼꼼하게 따지는 구석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스스로 찾고 공부하는 취미도 있어야 해요.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니죠." 에릭은 마케팅을 공부했다. 미셸도 뉴욕대학 시절엔 비판적 인종 이론(critical race theory)이라는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물론, 미셸의 공부는 법과 관련은 있었고 우등 졸업에 법원 인턴십까지 했기에 로스쿨 진학 때는 아이비리그의 입학 허가도 있었다. 그러나 미셸은 부모의 학비 부담을 덜어준다며 UC어바인 법대를 택해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인디애나주립대를 나와 로욜라 로스쿨을 졸업한 에릭은 택스 LLM(세법학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 이민법과 가정법이 강한 제인 정 법률사무소는 3년 전부터 에릭이 본격 합류하면서 상법에 조세 및 재정, 리빙트러스트까지 서비스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정 변호사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1982년 남편과 LA로 유학을 왔다. 그런데, 유학생 신분으로 영주권 신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인생의 전기가 마련됐다. "상담차 들른 유태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취업 제안을 받았어요. 당시엔 생활비 마련을 위해 CPA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변호사 사무실에서 영주권 해결과 상대적으로 좋은 임금을 제시했지요." 한인 이민이 증가하면서 영주권 해결 수요가 크게 늘던 때였다. 마침 유태인 로펌에서는 한국어와 영어가 동시에 되는 사람을 구하던 차였다. 그렇게 1987년부터 시작한 로펌 사무장 생활은 두 자녀를 낳고 주경야독 끝에 변호사로 변신해 지금의 로펌 대표까지 되는 계기가 됐다. 물론,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낮에는 사무장으로 밤에는 온라인 법학강의를 들었어요. 주말에는 직접 클래스 공부에 참여해야 했으니 좋아하는 일이 아니었으면 과연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싶네요." 한인타운 윌셔길에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유니버시티 로스쿨에서 지난 2000년 J.D.(법무박사) 학위를 받았고 1년 뒤 가주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로펌 2개를 거치며 15년을 사무장으로 있으면서 실무를 직접 챙겼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정 변호사는 사실, CPA 사무실에 다닐 때는 UCLA에서 회계학 공부를 해두기도 했다. 개인 로펌을 꾸리며 상법까지 분야를 넓힐 수 있었던 소중한 투자였다. 정 변호사는 지난 2005년 개인 로펌을 차려 독립했다. 사무장에서 변호사가 됐다고 해서 곧바로 박차고 나오기는 어려웠다. "한인 고객들과 동료가 당장 함께 옮기겠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담당 변호사에게는 독립할 의지를 밝혔고 충분한 시간을 줬던 것이죠." 현재 사무실에는 당시 함께 옮긴 직원과 변호사까지 8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변호사는 직업적 책임과 사회적 역할도 중요하다는 게 정 변호사의 생각이다. 정 변호사가 한인가정상담소나 한인타운 5개 비영리단체 협의체인 KOA 활동에 적극 참여한 이유다. 한인가정상담소에서는 이사장까지 역임하고 현재도 이사로 남아 가정폭력 피해자와 가족을 돕고 정부 단체로부터 그랜트를 받아 단체 운영이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있다. 정 변호사는 자녀들에게 모든 문제를 의뢰인 입장에서 생각할 것을 조언한다. 그러면,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해법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인 정 법률사무소가 지난해 발생한 포터랜치 개스유출 사건과 관련, 주류 유명 로펌인 EL&L과 집단소송에 참여해 한인 고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은 것도 그런 이유라는 게 정 변호사의 설명이다. "소송 참여 마감일이나 알아둬야 할 일들이 있는데, 주류 로펌은 영어로 된 서류만 나눠주거든요. 읽어 보라는 거죠. 그때, 한인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한글로 옮겨 전달하고 컨펌받는 일을 했어요. 고객이 알고 싶어하는 것들을 찾아서 알려주려는 노력이었죠. 제인 정 법률사무소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요." "모이면 법에 관한 얘기가 화두죠"…못 말리는 변호사 가족 요즘 정 변호사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다. 로펌에 합류한 아들 에릭이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어 여기저기서 칭찬이 자자한 탓이다. 컴퓨터에 익숙한 에릭은 자동서류작업 시스템을 도입해 사무실 업무의 효율성까지 높였다. "서류작업에 매번 똑같이 들어가는 표현들을 자동으로 불러낼 수 있도록 했어요. 사무실 직원들이 그 일로 인해 에릭에 대해 모두 감사해 하고 있지요. 이민 1세대나 기존 업무 스타일에 안주하면 나오기 힘든 창의적 발상이었죠." 하지만 아들의 표정은 썩 밝지만은 않다. 이내 참고 있던 한마디를 꺼낸다. "우리 어머니는 일을 너무 많이 해요. 주말에도 보내오는 각종 문건들 때문에 힘들어요." 지난 5일 모처럼 시간을 인터뷰에 참석했던 막내딸도 거든다. "정말 대단해요, 우리 엄마. 쉬는 틈이 없어요. 일 하시면서 시험공부도 하고 우리보고 하라고 하면 못했을 일이에요." 정 변호사의 얼굴이 살짝 굳어진다. 아들의 말이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일이 앞에 보이면 참을 수가 없어요. 내일이고 모레고 어차피 해야 할 일들이니 조금씩 미리 할 뿐이거든요." 정 변호사는 '앞으로는 주말에 보내는 내용들은 애써 체크하지 않아도 된다'며 정리를 한다. 사실, 정 변호사는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꼭 아들과 점심식사를 한다. 식사 중에는 한가로운 대화가 오갈법도 하지만 대부분 식사가 사무실에서 이뤄지기에 한담은 오래가지 않는다고. 이내 두 변호사는 일 이야기로 돌아간다. "어떻게 하면 법을 더 잘 이해할지가 우리의 화두라고요."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2017-09-10

"3대가 편하게 오는 '사랑방 병원'이죠"

LA한인타운 유일 '부녀치과' 1세 단골들은 아버지 '손길' 젊은 고객은 '김 원장' 찾아 "환자가 만족하는 모습 최고" LA한인타운 올림픽 불러바드에서 크렌쇼길을 따라 9가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왼편으로 '김광근 김소연 치과'라는 간판이 보인다. LA한인타운에서 유일한 '부녀치과'다. 아버지 김광근 박사가 지난 87년부터 오픈한 곳이니, 올해로 같은 자리에서만 꼭 30년 째다. 1976년 캘리포니아주 치과의사 면허를 획득해 1977년 1월에 개업한 것을 감안하면 40년 미국 치과의사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의사에게 '내 집'과 같은 곳이니 환자들에게는 '사랑방'쯤 되지 않을까. 장녀인 김소연 원장이 지난 2010년 본격 합류하면서 '김광근 김소연 치과'는 3대가 찾는 치과로 자리를 잡았다. 오랜 단골인 1세대들은 아버지 김 박사의 손길이 푸근하고, 영어가 편한 젊은 세대는 김 원장의 깔끔한 솜씨에 반한다. 부녀치과가 사랑방인 것은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세상사는 이야기 꽃이 끊임없이 피어나기 때문이라는 게 김 원장의 소개다. "특히, 할머니들이 그래요. 타주에 있는 자녀나 한국에서 친구들이 보내 온 편지를 들고 오세요. '눈이 잘 안 보여서 그러니 대신 좀 읽어 달라'고 하시죠. 편지를 읽다 보면, 웃기도 하시고 때론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세요." 서울대 치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보철학)를 받은 김 박사는 1975년 LA로 가족 이민을 왔다. 1965년 학부를 마치고 서울대부속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를 수료하고, 육군 군의관(대위)으로 전역 후 잠시 개업의로도 활동했으니, 한국에서도 10년 의사생활을 한 셈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새로 라이선스를 따야만 했다. "한국에서 다 마친 공부인데, 면허를 인정해 주지 않으니 별 수 없었죠. UCLA에서 익스텐션 과정을 수료하고 다시 USC의 2년 교육과정에 입학 하려고 했어요. 많은 사람이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대학 선배가 단지 면허만 딸 것이라면 아까운 돈 내버리지 말고 그냥 시험 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혼자 준비해서 10개월 만에 쉽게 땄어요." 1941년 생으로 팔순이 가까운 김 박사가 은근히 '공부 실력'을 자랑한다. 당시 김 박사의 합격 소식은 본지에도 큼직하게 소개가 됐다. 김 박사는 1977년부터 벤나이스, 라푸엔테, 레이크우드 등에서 병원을 운영하다 1984년 LA한인타운에 정착했고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게 1987년이다. 아직, 임플란트 시술이 알려지지 않던 시절 김 박사는 틀니 고정장치를 이용한 독특한 시술로 유명했고 지금도 이 분야에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원장은 USC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후 USC 치과대학을 졸업했다. "사실, 소아과 쪽으로 관심을 갖고 사람 심리에 대한 연구를 먼저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심리학과 의대 진학에 필요한 공부를 병행했어요. 그런데, 그만 아버지가 꾀는 바람에 치과전공으로 선회를 하게 됐죠." 김 원장은 학부 때 심리학을 공부한 게 어린이는 물론 어르신들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지난 97년 치과 라이선스를 딴 김 원장은 아버지 병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가든그로브와 세리토스에서 치과를 운영했다. 그러다가, 2010년 모두 정리하고 LA로 합류했다. 연세 드신 아버지를 대신해 치과를 운영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이제 부녀치과는 김 원장이 실질적 대표를 맡고 있다. "막 치과의사가 됐을 때는 제가 아버지 덕을 톡톡히 봤어요. 의사면허를 땄다고 해서 바로 개업을 한다는 게 사실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저는 운 좋게 아버지 병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개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거죠." 김 원장은 새내기 치과의사 시절의 혜택을 이제 아버지에게 돌려드리고 있다. 김 원장이 대부분 환자를 치료하고 김 박사는 일주일에 세 번만 나와 단골손님을 치료한다. 김 박사가 이제는 딸의 보조의사가 된 셈이다. "비즈니스만 생각하면 아마 함께 일 안 하는 게 맞을 거예요. 그래도, 아버지를 찾는 단골이 아직은 있고, 또, 함께 사무실에 나와 많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김 박사는 딸이 병원을 좀 더 키우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김 원장 생각은 다르다. "병원이 커지면 아무래도 환자와의 접촉이 사무적이 될 가능성이 커요. 의사는 환자 상태를 진단한 후에 임플란트가 좋은 지 틀니나 브리지는 어떤 지 등을 설명하고 선택하게 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해야 해요. 큰 병원을 하게 되면, 지금처럼 부녀치과가 사랑방 구실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요. 그냥 지금처럼 부녀치과를 다녀 간 환자들이 만족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아버지의 진짜 뜻이라고 이해해요. 그 게 제 바람이기도 하고요." "하고 싶은 말은 다하는 사이죠" 부녀가 함께 일하는 방법 예약 시간에 많이 늦은 환자를 두고 아버지는 상대가 민망해 할까봐 연신 '괜찮다'고 다독인다. 하지만, 딸은 다른 환자 스케줄에 영향이 있다며 따끔하게 제지한다. "아빠, 왜 그렇게 하세요." "알았다. 잔소리 좀 그만해라."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가. 사랑스럽기만 하던 딸이 어느새 아버지가 두려워하는(?) 잔소리꾼으로 변했다. 그렇다고, 마냥 이어지는 딸의 잔소리가 싫지 않은 지 김 박사는 그저 빙긋이 웃고 만다. 아들이 둘이나 더 있지만, 아버지의 꿈을 이뤄준 딸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닌 탓이다. 둘째이자 장남인 폴은 변호사의 길을 걷고 있고, 막내아들 조셉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막내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게 살짝 후회된다고 한단다. 요즘도 김 박사는 라이선스 유지에 필요한 공부를 위해 딸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보드에서 요구하는 2년 50유닛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모든 준비는 딸이 알아서 척척 해둔다. "아들이었으면 절대 그럴 일 없었을 것이니,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라고 한다. 딸은 아빠가 고맙다고 했다. "새내기 의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한 번도 화를 내거나 가르치려 하시지 않았거든요. 아주 큰 일이 아니면 시행착오를 통해 배울 수 있도록 해줬지요. 개인치과를 남들보다 빨리 낼 수 있었던 이유였죠." 딸은 평생 공부하고 병원 일에만 매달린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매년 함께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유럽도 가고 한국과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녀요.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더 많은 추억을 쌓아야죠. 잔소리요? 어느 때고 그건 빼놓을 수 없지요. 우리 부녀는 할 말 안 할 말 다 하는 그런 사이인 걸요."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2017-09-04

"두 아들 합류로 경쟁력이 몇 배 커졌죠"

큰 아들은 10년째 '파트너' 타커뮤니티로 고객 확대 가족 사업 고객 신뢰 높아 다른 업체 인수·합병 진행 "해충을 잡아 피해를 막고 환경도 정화하니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가요. 게다가 경제적 보상까지 따르니 이만한 직업도 흔치 않죠." LA한인타운의 해충 박멸 업체 'KD 미드웨이 터마이트 & 패스트 컨트롤(이하 KD 미드웨이)' 박명수(60) 사장은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1994년 LA로 이민온 후 23년 째 하는 일이라 '벌레 잡기'라면 도사급이다. "문의 전화를 통해 딱 한두 마디만 들어 보면 어떤(벌레) 문제가 있고 어떻게 박멸해야 할지 감이 옵니다." 이런 도사 옆에 믿음직한 두 아들까지 가세를 했으니, 삼부자가 한 곳으로 출동하는 날이면 어느 곳의 어떤 해충이든 사라지고 만다. 큰아들 재균(33)씨는 아직 아버지 경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미 10년차 베테랑. 유명 패스트 컨트롤 기업인 오킨(Orkin)에서 운영하는 1년 과정의 터마이트스쿨(트레이닝 센터)까지 졸업했다. 아버지의 든든한 지원군이자 파트너인 셈이다. 재균씨와 3살 터울인 막내아들 재성씨는 이제 2년 쯤 됐다. 샌타모니카칼리지에서 비즈니스를 공부한 재성씨는 한인타운 인근의 굿사마리탄병원에서 오피스 업무를 하다 합류했다. 아직 배워야 할 것도 많다. 최고 단계인 오퍼레이터(Operrator) 라이선스 취득을 위해 '주경야독' 중이다. 두 아들의 가세는 타 커뮤니티로 고객층을 넓히는 계기도 됐다. 아버지의 경험에 언어 등 미국문화에 익숙한 두 아들이 힘을 합친 결과다. 현재 KD 미드웨이의 타인종 고객 비율은 20% 정도. 박 사장은 "사업이라고 하고는 있지만 살충 장비가 실린 작은 트럭 2대와 업무용 차량 1대, 주택 게스트하우스를 오피스로 쓰고 있는 게 전부다. 사실, 가업을 잇는다고 말하는 게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그런데, 두 아들과 함께 하면서 기동력이 늘고 고객 신뢰도 쌓여 사업 확장의 여력도 생겼다"라며 최근 사업체 인수협상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해충을 박멸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아요. 당장 바퀴벌레만 해도 그 종류가 수 천종입니다. 물론, LA에서 주로 잡는 바퀴벌레는 독일바퀴, 아메리칸바퀴, 오리엔털바퀴 등 크게 3가지 나뉘고 10여 종 정도이지만, 그들의 생김새, 습성을 모두 기억해야 해요. 그리고 의사가 병에 따라 '처방전'을 달리 하듯 해충 박멸에 필요한 약품(살충제)도 다르고, 희석 비율도 달라지죠. 어디 바퀴벌레만 잡나요. 터마이트, 쥐, 모기, 벼룩, 빈대 등 해충으로 분류되는 20~30종의 벌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해요. 살충제 성분이나 사용방법, 응급처치요령 등도 반드시 익혀야 할 내용이죠." 유령잡는 '고스트버스터(Ghostbuster)'처럼 '해충박멸전문가(Pestbuster)'가 되기도 결코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다. 가주 패스트컨트롤보드에서 운영하는 라이선스는 3단계로 구분된다. 애플리케이터(Applicator), 필드 레프리젠터티브(Field Representative), 오퍼레이터 순이다. 모두 해충박멸 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지만, 내 이름으로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으려면 오퍼레이터(퀄리파잉 매니저)가 돼야 한다. 필드 레프리젠터티브에서 오퍼레이터 라이선스를 따려면 그냥 시험만 통과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2단계 자격증을 가진 후 제너럴 패스트 컨트롤 오퍼레이터는 2년, 터마이트 컨트롤 오퍼레이터는 4년의 실무 경력을 갖춰야 한다. 목조주택의 나무를 갉아 먹는 터마이트를 박멸하려면 건축구조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하는 만큼 시간이 더 소요된다. 박명수 사장도 이민 초기엔 궂은 일부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약품도매상을 했어요. 그런데, 막 LA에 와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더라고요. 영어구사도 잘 안되고. 먹고 살기 위해 청소일도 따라 다니며 해보고, 택시일도 했지요." 그렇게 지내던 박 사장은 어느 날 지인들이 패스트 컨트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운명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한국에서 약품사업을 한 탓에 이해나 취급 요령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박 사장은 곧바로 애너하임에 있는 터마이트스쿨인 프랭클린칼리지라는 곳에 등록했다. 1년 이상 과정의 코스였는데 6개월 만에 자격증을 획득했다. 23년 패스트 컨트롤 인생의 시작이었다. 라이선스 단계가 있어 중국인 기업에서 파트너로 일을 하다가 지난 2000년에서야 미드웨이를 차려 독립했다. 박 사장이 자격증을 딸 당시만 해도 업계에 한인 종사자가 많지 않았다. "한인타운에 등록된 회사는 6~7개 정도였죠. 한인 종사자도 20명 수준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데, 요즘은 회사만 40곳에 종사자도 300명 쯤은 될 겁니다." 자격증을 따야하고, 독한 살충제 성분을 다루는 일이라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되는 어려움이 있지만 돈도 되는 일이라 한인들의 진출이 계속해서 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경쟁은 더욱 치열해 졌다. 박 사장이 첫째와 둘째 아들에까지 사업을 함께 하자고 권한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 사업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형제의 '환상 팀워크' "삼부자가 출동하는 날은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더욱 신이 납니다. 번갈아 가면서 한 명은 호스를 잡아 거리를 조절하고, 다른 두 명은 노즐을 잡아 소득을 합니다. 그렇게 서너 시간 땀에 흠뻑 젖고 나면 그 상쾌함은 어디에도 견주지 못하죠." 방역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삼부자는 가족이야기, 사업이야기로 꽃을 피운다고 했다. 형제간 우애도 좋아, 아버지는 기대가 크다. "큰아들은 업계 최고 자격을 갖췄고 사업수완이 좋아요. 작은아들은 세밀한 구석이 있어, 타인종과의 계약이나 서류작업을 도맡죠. 큰 애가 일을 벌이고 작은 애가 치밀하게 챙기는 조합이라면 회사를 금방 키울 수 있지 않겠어요." 요즘 큰아들이 잠시 서울에 가 있어 박 사장은 당분간 작은아들과 일을 하고 있다. 사무실 업무만 하다 방제복을 입고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볼 때는 안쓰러움도 든다는 게 박 사장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런데, 막내아들 재성씨는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다고 했다. 재성씨는 "병원 일이 깨끗하기는 하지만 고충도 있었다. 하지만, 패스트 컨트롤을 배우면서 시간도 나고,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도움이 크다"며 "솔직히, 그동안 잘 몰랐던 아버지의 마음도 알게 되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형은 아직 제게 '큰 산'이죠, 그런데 저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거든요"라며 은근히 경쟁심을 발동한다. KD 미드웨이의 미래는 이제부터 본 게임이 될 것같은 느낌이다.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2017-08-27

"창의성의 시대…남매에 기대 큽니다"

LA다운타운 최대 난 매장 농장에서 직접 재배·유통 꽃·서플라이 원스톱 서비스 "고객이 밸류 느낄 수 있어야" 남매가 닮았다. 선하고 깨끗한 인상이 멀리서 봐도 딱 오누이다. 성격은 차이가 있다. 동생은 야무졌지만 오빠는 조금 여유가 있다. 두 살 위인 오빠는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고 창의적이다. 동생은 실무적 감각이 탁월해 벌써 부친 회사의 매니지먼트를 총괄하고 있다. LA다운타운의 꽃 도매상인 리스 오키드(Lee's Orchid)의 이상각 대표는 그런 이유로 자녀가 힘을 모아 가업을 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아들은 예술을 전공해서 그런지 남들이 잘 생각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온라인 마케팅을 담당하는데, 사진을 하나 찍어도 아주 디테일하게 진행한다. 딸은 일처리가 똑부러진다. 캘스테이트 풀러턴서 비즈니스를 전공한 후 회사에 합류한 지도 벌써 8년 째다. 부족한 점을 상호보완하면 좋은 조합이 나올 것 같다." 이 대표는 아들, 데이빗(31)의 창의성에 주목한다. 데이빗은 패서디나 아트스쿨에서 파인아트를 전공했다. 회사에 합류한 지는 4년 쯤 됐다. 요즘은 꽃 사업도 온라인으로 옮겨 가는 추세라, 아들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이 대표는 "앞으로 기업의 사활은 창의적 사고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남들과 같아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 대표는 자신이 은퇴 후 오누이가 더 크고 멋진 오키드 매장으로 키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리스 오키드는 다운타운 플라워 디스트릭트인 샌줄리안 스트리트를 따라 7가와 8가 사이에 본사 사무실을 겸한 2만 스퀘어피트 규모의 2층 건물에 입주해 있다. 난을 뜻하는 오키드라는 상호에서 알 수 있듯이 난 매출 비중이 크다. 이 대표는 "난으로만 치면 아마 우리 회사가 미국에서도 제일 클 것이다. 난을 중심으로 컷 플라워 등 플랜트가 전체 매상의 80%, 나머지는 화분, 비료, 리본 등 다양한 서플라이 판매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플라워 디스트릭트 도매상가에는 전체 120여 업체가 있고 그 중 한인이 운영하는 곳은 10% 정도라는 게 이 대표의 말이다. 리스 오키드는 인근의 월과 메이플 스트리트에 있는 꽃 도매상가에도 10개, 한인타운 가주수퍼마켓 3층에 전문 리테일 매장 1개 등 12개의 도소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리스 오키드가 난 비중이 큰 것은 샌디에이고카운티 폴브룩과 샌마르코스시에 별도의 난 농장을 직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개 농장에서만 한해 100만 개의 난 화분을 생산한다. 난은 주로 대만 등지에서 모종을 항공기로 공수해 온 뒤, 온도 및 살수 시스템이 자동으로 조절되는 농장에서 재배된다. 컷 플라워는 모두가 수입산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전에는 샌프란시스코나 샌디에이고 등지에서도 재배했지만, 이제 미국에서 재배하는 컷 플라이워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리스 오키드는 신선도 유지를 위해 난이나 컷 플라워는 공항에서부터 쿨러 차량을 이용해 쿨링 시설을 갖춘 농장이나 도매상가 내 부스까지 옮겨, 선선도 유지에 전력하고 있다. 이 대표는 "한인타운에만 꽃 소매상이 40여 곳이다. 그들 외에 인근 및 타지의 타인종 소매업소에서도 꽃을 사가는 데, 최대한 좋은 상태의 꽃을 공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1년 LA로 이민한 이 대표는 원래 부동산 사업을 했다. "꽃과 난 농장사업이 가업으로까지 이어질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한다. 이 대표는 부동산 가치가 조금 떨어지는 물건을 사서 리모델링해 되파는 일을 주로 했다. 그러던 차에 지난 2000년 벤투라카운티 쪽에 인수한 2개의 난 농장을 매각하지 못하고 운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 대표는 "이민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부모님이 하던 농기자재상을 운영한 경험이 있던 터라, 농장 운영에 유리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농장운영은 간단한 농기구나 농약, 비료, 씨앗 등을 파는 일과 달랐다. 이 대표는 농장에 간이 숙소까지 마련해 숙식을 해결하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이 대표의 두 자녀도 시간이 날 때는 농장에 나와 비닐하우스를 치는 것을 돕는 등 힘을 보탰다. 한 번 시작한 일은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 성격의 이 대표인지라 이내 난을 키우고 유통하는 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었다. 리스 오키드는 난이나 플라워와 관련해서는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내 조직도 난을 수입하고 키워내는 그로잉사업부, 홀세일 파트, 웨딩과 장례용 꽃 디스플레이를 하는 이벤트사업부 그리고 사무를 총괄하는 오피스로 나뉘어 70여 명의 직원이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대표는 "리스 오키드의 꽃이나 난을 찾는 고객에게는 최고의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이다. 사업을 돕는 자식들에게도 특별히, 고객이 오키드 상품에 어떤 밸류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고 전했다. "함께 일하고 있다는 자체가 행복" '사랑과 존경'의 파트너 리스 오키드는 호접란(팔레놉시스 phalaenopsis)을 전문으로 한다. 동양이나 서양에서도 '나비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비가 나는 모습을 보면 아마 누구라도 '사랑'과 '행복'을 느끼지 않을까? 호접란의 꽃말도 그렇다. '당신을 사랑한다' 혹은 '행복이 날아든다'. 이상각 대표가 가업을 잇고 있는 두 자녀와 매장을 둘러보는 모습이 딱 그랬다. "애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죠. 아버지 일을 돕겠다고 애쓰는 모습도 너무 사랑스럽고요." 아직, 이 대표가 바라보는 두 자녀는 온실 속에 있다. 딸, 새라는 "아버지의 추진력이나 비즈니스 수완 등을 배우려면 한참 멀었다"라고 말한다. 데이빗도 "아버지가 작게 시작한 난 농장을 지금처럼 키워냈다는 데 존경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데이빗과 새라, 남매에게 '난'이란 질문을 던졌을 때 "생명체를 키우는 진짜 소중한 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대표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면서 살려 내려고 노력했던 그 난(사업체)이 자녀들에게도 생명처럼 소중한 느낌이었으리라. '아직 멀었다'고는 하지만 이 대표의 입에서 '은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남매에 대한 그런 믿음이 큰 탓이 아닐까.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2017-08-20

"생업 수단으로 시작했지만 이젠 천직"

20년 넘게 함께 일한 '동지' 손재주 좋은 둘째 딸 '큰 힘' 어머니는 선교에도 전념 딸 헤어숍에서 일하는 재미 지난 2014년. 꼭 20년을 한 자리에서 같은 일에 종사한 모녀는 큰 고민에 휩싸였다. 30년을 미용사로 일한 어머니는 더 이상 미장원을 꾸리기 벅찬 상태였다. 하루 종일 서서 하는 일이라 관절이 약화하고, 오른 중지 끝 마디 인대마저 손상돼 깁스를 해야 할 판이었다. 마침, 사업체 인수를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창 공부해야 할 두 자녀를 둔 딸도 살림까지 하면서 몰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LA한인타운 로데오 갤러리아몰에 있는 헤어월드는 전속 미용사도 6~7명이나 되는 규모 있는 사업체였다. 고심 끝에 모녀는 사업체를 넘기기로 했다. "지금 얘기지만 당시엔 인수하는 측에서 모든 것을 그대로 넘겨받기를 원했지요. 상호도 그대로 쓰기로 했기 때문에 주인이 바뀐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어요. 아쉽고 미안했지만 단골손님들에게조차 일일이 인사를 하지 못했지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 분들께 너무 죄송하고 그리고 또, 감사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일흔 나이를 앞둔 어머니 정향숙 원장은 그렇게 은퇴를 했다. 모녀의 가업 잇기도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평생 미용사로 일해 온 정 원장은 왼무릎 수술을 받고, 손가락 인대 치료를 하면서 어느 정도 건강을 추스를 수 있게 되자 다시 가위를 잡고 싶어했다.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손님 머리를 깨끗하게 정리해서 모양을 내주고, 그에 만족해 하는 모습을 보는 기쁨은 어떤 다른 것과도 바꿀 수 없어요." 하지만, 뒤늦게 다시 미용실을 차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대신 정 원장은 선교활동에 더 열심히 참가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신자인 정 원장은 헤어월드 원장시절부터 매년 중남미 선교활동에 참여해 왔다. 정 원장이 하는 일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미용 재능을 기부하는 것이었다. "지난 5월에는 코스타리카에 다녀왔어요. 보통 열흘 정도 선교를 가면 500-600명 정도의 머리를 감기고 헤어컷을 하죠. 하루가 저물면 손가락이 뻐근해 제대로 오므릴 수도 없어요. 그래도 그렇게 10일 정도 머물며 봉사를 하고 나면 마음이 너무 편해져요. 남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거죠." 정 원장은 아직 손가락이 채 아물지 않은 상태지만 지난 주말에도 LA 남부 낙후지역인 캄튼으로 선교활동을 다녀오기도 했다. 둘째 딸인 민 김(45. 결혼 전 성 그대로 소개 원함)씨도 20년 가위 솜씨를 그대로 묵히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물론, 사업체 정리 후 김씨는 자녀를 돌보는 데 올인하면서 첫 째인 딸, 앨리스가 UCLA 4년 전액 장학생에 선발되는 기쁨을 맛봤다. 이제 막내 아들도 고등학생이고 스스로 잘 챙기는 편이라 다시 미용실 사업에 대한 미련을 갖기 시작했다. 김씨는 한인타운 3가와 호바트 코너에 지난 5월 '민 헤어숍'을 오픈했다. 800스퀘어피트 규모의 아담하지만 부티크 스타일로 꾸몄다. 헤어숍 운영은 철저히 예약방식을 고수한다. 업체 평가사이트, 옐프 리뷰를 보고 찾아 오는 타인종 손님들도 많은 편이다. 예약은 최소 30분 단위 이상으로만 받는다. "손님 한 명 한 명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인터넷을 보고 멀리서 찾아오거나 단골손님이었던 분들도 있는데, 5~10분 만에 뚝딱 해치우면 너무 섭섭하잖아요. 머리도 감기고, 가위질을 하면서 사는 이야기도 하고, 저는 그런 재미가 좋아요. 손님들도 좋아 하고요. 아마 그런 것 때문에 한 번 찾아 오면 계속해서 오는 것 같더라고요." 아무리 예약 위주로 운영을 해도, 무작정 찾아 오는 손님이 없지는 않다. 난감하지만 그냥 돌려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럴 때는 '30년 가위 장인'이 나선다. 어머니 정 원장에게 SOS를 치는 것이다. 김씨는 "어머니는 지금도 가위만 잡으면 행복해 하신다. 너무 급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며 "고객 머리를 단장하는 솜씨는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고 자랑한다. 요즘 정 원장은 옛 단골손님 요청만은 거절하지 못하고 일주일에 서너차례는 헤어숍 전속 미용사로 변신한다. 정 원장에 미용사는 천직이다. 한국에서도 명동의 한 업체에서 헤드미용사로 10년 이상을 일했다.1991년 LA로 이민온 후로도 줄 곧 가위를 놓지 않았다. "처음 2년은 남의 밑에서 일을 했지요. 그러다가 로데오몰에 개인 미용실을 냈는데, 솜씨가 좋아서 그런지 단골들이 많이 생겼어요. 너무 바쁘다 보니, 손재주가 좋은 둘째딸에게 배워볼 것을 권했지요." 1남2녀의 자녀들 중에서 둘째가 미용사로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게 된 계기였다. 김씨도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다. 어디 나다니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실내에서 손님 머리카락만 자르는게 재미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해 둘째를 갖고 가정 경제에도 보탬이 될 필요 때문에 미용사에 도전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용사는 자격증을 따는 것부터 쉽지가 않아요. 미용학교에 등록해 무려 1600시간을 이론과 실기 공부한다게 보통이 아니죠. 그렇게 라이선스를 딴다고 해도 다시 손님을 제대로 받기까지 3년 정도의 수습이 필요하거든요." 다행히 김씨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고, 지금도 짬만 나면 수다를 떨 수 있는 '미용실의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김씨는 "생일을 맞거나 결혼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안 받았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땅 파서 장사 하냐'며 참 많이도 혼냈죠"라며 웃는다. 전에는 어머니가 사장님이었다면, 민 헤어숍에서는 이제 김씨가 사장으로 베테랑 정 원장과 새로운 얘깃거리를 만들고 있다. "마추지는 사람들 머리만 보여요" 모녀의 '직업병'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하다 보면 누구나 직업병이라는 걸 달고 살게 마련이다.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은 어깨와 손, 발레리나는 발(가락), 야구선수(투수)는 어깨와 이빨이 성치 않다. 정향숙 원장도 30년 넘게 가위질을 하다 보니 손가락 인대가 끊어지고 뻣뻣해 지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신체적인 병만 있는 게 아니다. 정 원장이나 둘째 딸 김씨는 같은 '병'이 있다. 외출을 하면, 그들의 눈에는 온통 사람들 머리만 보인다고 한다. 정 원장은 "손질이 잘 된 멋진 모습이 있는가 하면, 정말 성의없이 깎인 머리(카락)도 있어요. 내 손님이면 금방이라도 다시 만져 주고 싶은데, 달리 방법은 없고. 그럴 때면 혼자 상상으로 가리마를 왼쪽, 오른쪽으로 타보고, 머리카락을 잘라도 보고 붙여도 보면서 최상의 조합을 찾죠"라고 말한다. 미용사라는 직업이 의외로 최신 뉴스에도 민감해야 한다. 물론, 뉴스가 주로 최신 유행과 패션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모녀는 함께 TV나 인터넷을 보면서 '최근 헤어 스타일 따라잡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 원장은 "미용사는 한 달만 쉬어도 유행에 뒤처진다. 지금은 젊은 사람들도 살짝 퍼머를 하는 게 유행이다. 그런 것을 알아야 손님에게 좋은 서비스를 할 수 있고.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2017-08-13

"병원에선 '아빠와 딸' 보다 든든한 동료"

늦깎이로 도전한 둘째 딸 LA한인타운에 있는 '올림픽 동물병원'의 권태삼(64) 원장에겐 든든한 '동료'가 있다. 나이 차가 좀 있지만 신학문으로 무장한 탓에 배우는 것도 많다. 진단이 까다로운 동물의 상태를 두고 머리를 맞대다 보면 정확한 치료법을 쉽게 찾기도 한다. 권 원장에게 힘이 되는 동료는 둘째 딸, 루시아(34.한국이름 혜현)다. 권 원장은 "혼자일 때 보다 진단이 빠르고 정확하다. 아버지의 오랜 경험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동물 치료의 가장 좋은 방법을 찾고자 하는 모습이 믿음직하다"고 말한다. 권 원장은 2년여 전 10살짜리 골든리트리버 진단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한인 고객이 데려왔는데, LA 인근 여러 병원에 가봤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다. 밥을 안 먹고 고열에 시달리며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일단 링거를 맞춰 살려놓고 소변 및 혈액검사를 했는데도 별 이상이 없었다. X-선, MRI 촬영을 하면서 원인을 찾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딸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신경 부분 MRI를 다시 했고 결국 '쿠싱'이라는 개들에게서 많이 발병하는 일종의 뇌종양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주인은 개가 2년 정도만이라도 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원인을 찾아 방사선 치료를 잘 한 덕에 2년 이상 살고 있다"고 뿌듯해 했다. 열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 권 원장은 1992년 산타클라리타에서 병원을 시작했고 3년 전 LA한인타운으로 이전했다. 루시아와 동물병원 일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UCLA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루시아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됐다. 딸만 셋인 권 원장은 은근히 한 명쯤은 같은 공부를 해서 함께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수의학이라는 게 일반 의과대학 과정과 비슷해 공부하기가 쉽지 않고, 흥미도 있어야 해서 강요하지는 않았다. 결국, 세 딸 모두가 다른 전공을 택했다. 큰딸, 지현(36)은 역사를 공부해 교사가 됐다. 막내, 승현(30)은 영화 쪽에 관심이 있어 지금은 할리우드의 한 영화사에 근무 중이다. "정말, 뜻밖이었죠. 어느 날 둘째가 수의사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뒤늦게 수의학 공부라니요." 서울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권 원장은 미국에서는 한국 수의사 면허를 인정하지 않아 독학으로 외국인 수의사과정(ECFVG)을 공부했다. 머리 맞대면 진단 더 정확 1983년 샌호세로 이민을 왔고 당시 컴퓨터회사에 다녔던 터라 짬을 내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둘째 딸의 뒤늦은 도전이 안쓰러운 이유이기도 했다.하지만, 둘째 딸의 의지가 워낙 강해 결국 승낙을 했고 하얀 가운을 입은 딸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루시아는 카리브해 세인트키츠&네비스에 있는 수의학 전문 로스대학(RUSVM)에서 4년을 공부해 무난히 수의사 면허를 받았다. RUSVM에서 공부할 때 버려진 개와 고양이 한 마리씩을 돌봤는데, 지금까지 키우고 있을 만큼 동물에 대한 사랑도 깊다. 루시아가 병원에 합류한 것은 2년 반쯤 됐다. 그후 권 원장의 생활도 많이 달라졌다. 타인종 직원 2명과 근무할 때는 일 이외의 이야기가 별로 없었지만, 루시아가 합류하면서는 집이나 일터에서도 동물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권 원장은 "금요일 오전에는 딸이 혼자 근무를 해 조금 느긋하게 출근하는 여유도 갖게 됐다"며 웃었다. "아버지와 함께 일하니 마음이 든든하다. 책을 통해 많은 내용을 배웠지만 아버지의 경험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루시아는 "진로를 바꿔 수의사의 길을 걸으면서 베테랑 수의사인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큰 행운"이라고 말했다. 경험·열정 '아름다운 동행' 인터뷰를 위해 최근 두 번째로 병원을 찾았을 때는 마침 흰색 털의 작고 귀여운 말티즈가 수술대에 올라 있었다. 배 안쪽에 있는 작은 돌기(종양)를 제거하는 수술이었다. 수술은 루시아가 맡았다.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어 주사보다는 가스마취를 택했다. 권 원장은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 데, 약물로는 오래가지 않는다. 수술 중 동물이 깨면 위험할 수 있다. 40분~1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라면 가스마취가 안전하다"고 설명했다. 말티즈의 입을 열고 호스를 연결하는 루시아의 손길이 빠르고 정확했다. 반창고로 고정한 호스가 탄탄하게 밀착됐는지를 확인하고는 흡입성 마취제인 이소플루레인을 주입했다. 말티즈가 곧바로 마취상태로 빠져들었다. 초록색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손을 몇 번이나 깨끗이 씻어 소독한 루시아가 메스를 건네 받았다. 수술은 40분 정도 이어졌고, 수술실을 나서는 루시아의 표정은 밝았다. 권 원장은 "딸이 많이 해 본 수술이라 잘한 것 같다. 정말 대견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가업 승계보다는 '아름다운 동행'이란 말이 더욱 또렷해지는 순간이었다. "병원 확장보다 정성어린 치료가 먼저죠" 수의사 부녀의 희망 LA한인타운 올림픽과 크렌쇼 불러바드 북쪽 코너에 있는 올림픽동물병원은 자그마하다. 그래도 리셉션 데스크, X-선 촬영기를 갖춘 진찰실, 마취 및 수술도구가 있는 응급 및 일반 수술실, 동물보호 케이지 등이 깔끔하게 잘 정돈돼 있다. 권 원장은 루시아가 합류한 후 병원 확장도 고려했었다. 하지만 좋은 서비스가 우선이라는 생각이다. 동물을 사랑해서 키우지만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경제적 사정 때문에 안락사를 선택하는 고객을 볼 때는 안타깝다고 말했다. 권 원장은 "큰 수술이라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 동물보험이 있다면 다르지만 가입한 한인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며 "무리한 확장보다는 내가 건강을 유지하며 찾아오는 고객들을 더 오랫동안 돕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더 크다"고 밝혔다. 물론, 권 원장도 병원 규모를 키워서 딸에게 넘겨줄 수 있다면 만족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딸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훌륭한 수의사의 길을 걷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이다. 그러나 루시아도 "사람들은 이제 애완동물을 가족으로 생각한다. 수의사로서 그들에게는 가족인 동물치료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지금처럼 아버지와 함께 노력하다 보면 단골손님도 늘고 좋은 기회도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2017-08-06

"항상 '올 오어 낫싱'의 자세를 강조합니다"

부동산학교·에스크로 등 한인 최대 '부동산 그룹' 아들·딸 내외까지 합류 '최고의 브랜드로 키우길" 부부는 물론 아들과 딸, 그리고, 사위에 며느리까지. 2대에 걸쳐 가족 6명이 모두 동종 업계 자격증을 갖고 있다. 남편과 아내, 딸은 부동산 브로커 자격을, 나머지는 에이전트 라이선스다. 뉴스타 부동산 그룹(New Star Realty & Investment Group) 남문기(64) 회장 패밀리 이야기다. 남 회장이 '우리는 브로커 가족이야. 뉴스타의 대표 브로커도 28년째 아내인 제니 남으로 돼 있다고"라고 웃으며 이야기할 만도 하다. 남 회장의 부동산 사업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뉴스타 부동산은 1988년 9월 25일 리얼티월드 뉴스타로 출발, 내년이면 꼭 30년이 된다. 현재, 뉴스타는 부동산학교와 장학재단, 광고기획사, IT회사, 투자그룹, 매니지먼트, 에스크로 컴퍼니 등의 계열사와 30여 개 지사에 본사 직원 80여 명을 포함해 10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아들(알렉스. 34)과 딸(에이미.32) 부부도 합류하면서 사업이 더욱 활기를 띠고, 자연스럽게 경영승계도 진행되고 있다. 4년 전 가세한 에이미는 에스크로 회사의 CEO로 일하고 있다. 애초, 남 회장은 UC리버사이드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딸이 정치를 하기를 바랐다. LA한인회장, 미주한인총연합회장,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장 등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한인 정치력 신장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탓이다. 실제로, 에이미 사장은 주 하원의원 보좌관으로 2년 근무하기도 했다. "정치는 재미가 없었어요. 내게 잘 맞지도 않고, 그래서 정치는 아버지가 하시고 가정을 택하겠다고 했지요." 외부 회사 경험을 쌓느라 뒤늦게 합류한 알렉스는 사내 주요 파트를 돌며 실무를 익히고 있다. 아직 특별한 직함 없이 에이전트다. 그는 "아버지의 리더십과 경험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도 기회와 능력이 되면 회사를 운영하고 싶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며 포부를 밝혔다. 의류업체 매니저로 일했던 사위 서지오 성 에이전트도 필드 경험을 쌓고 있다. 부동산학교 운영을 맡고 있는 제니 남 사장은 "사실, 가업을 잇게 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조금 늦었다. 애들이 좀 더 일찍 합류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며 "부부가 비즈니스에 매달리느라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큰데, 그래도 뉴스타에서 열심히 배우고 이제는 부모의 일을 나누기도 하는 정도라 고마울 뿐"이라고 밝혔다. 건국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주택은행에 근무하던 남 회장은 결혼 1년 만인 1982년 LA로 왔다. 수중에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300달러가 전부였다. 유학이 목적인 도미였지만 생활고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청소회사에 취업을 했다. 사장과 히스패닉계 청소원 2명이 고작이라 시작부터 팀장을 맡은 남 회장은 해병대(266기) 시절 익힌 강인함과 한인다운 지혜로 금방 회사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남 회장은 '청소의 달인'으로 인정받았고 4년 만에 직원이 65명으로 느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미국생활에 안정을 찾게 되면서 남 회장은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부동산이었다. 주택이나 빌딩 청소를 하면서 부동산 경기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이 새로운 선택을 하게 했다. 시작부터 남달랐다. 1987년 12월 에이전트 자격증을 손에 쥔 남 회장은 여느 에이전트들하고 달랐다. 청소하면서 조금씩 모은 4만 달러 전부를 투자했다. 첫 출근부터 비서를 두고 출발했다고 하니, 유별나기도 했다. 옷에는 이름표를 달았고, 신문과 지역 광고지, 버스 정류장 벤치 등에는 얼굴을 새긴 다양한 광고를 게재했다. 새벽 7시면 출근해 밤 늦게까지 일에만 매달렸다. 남다른 점은 또 있다. 부동산 일을 하고부터는 지금까지도 흰색 와이셔츠에 항상 빨간 넥타이를 매고, 자켓을 입는다. 와이셔츠의 앞 포켓에는 Attitude(태도)라는 단어를 새겨 놓았다. "깨끗하고 공손한 태도는 남에게 좋은 첫인상을 주게 된다. 당연히 고객이 더 많을 수 밖에 없다." 남 회장은 회사 수익의 사회환원 차원에서 장학사업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지난 20일에는 17회째 뉴스타 장학재단 장학금 수여식을 했다. 2001년 개인적으로 시작해 2003년 장학재단으로 확대했다, 올해로 총 1390명에 130만 달러를 지급했다. 지난 5월엔 모교인 건국대에 10만 달러를 쾌척하기도 했다. 남 회장은 성공의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가진 걸 전부 걸으라고 조언한다고 했다. "돈 일 수도 있고, 또 능력, 노력이 될 수도 있어요. 실패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눠 쓰더라구요. 그러면 안돼요. 모두 쏟아붓고 정직하게 전력투구하는 겁니다. 그만큼 절실하게 달라붙어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남 회장은 가업을 이을 자식들에게도 늘 같은 말을 강조한다.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이라고. '브로커 패밀리(?)'다운 승부수가 아닌가. "아버지의 추진력 본받고 싶어요" 가족이 한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흔치 않다. 본사 직원만 80여 명 되는 큰 조직에 아내와 아들, 딸, 사위가 함께 근무한다. 에이전트 자격을 가진 며느리만 아직 다른 회사에 근무 중이다. 남 회장은 며느리까지 조만간 합류하게 되면 완벽한 팀이 구성될 것이라며 기대가 크다. 뉴스타는 8가와 버몬트 애비뉴에 있는 두 개의 빌딩을 본사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제니 남 사장은 "함께 일을 해도 각자 맡은 일이 있어 한곳에 모이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가족끼리 점심도 할 수 있어 좋다"며 "딸은 식사 때만큼은 비즈니스 얘기를 하지 말자고 하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일이 화제가 되곤 한다"며 웃는다. 아들, 알렉스에게 아버지는 우상이다. 알렉스는 "아버지의 추진력은 정말 대단해요. 정말 배울 점이 많다"며 고개를 젓는다. 남문기 회장은 지난 2012년 간암수술을 받았다. 3개월 시한부 삶이라는 진단을 극복하고 지금은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아직 할 일이 더 있어서 안 간 것 같다"고 말한 남 회장은 뉴스타가 한국에도 본격 진출하고 미 주류사회에서도 최고 부동산 브랜드로 성장하길 바란다. 또, 기회가 된다면 미주 및 해외 한인들의 권익신장을 위한 비중있는 역할을 맡고 싶다고 했다. 남 회장은 현재 해외한민족대표자협의회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대학시절 소개팅으로 만나 결혼한 제니 남 사장은 남 회장을 두고 "사실 돌인 줄 알고 주웠는데, 알고 보니 다이아몬드였다"며 수줍게 웃는다. 뉴스타 부동산을 움직이는 가족의 사랑스런 모습이다.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2017-07-30

"두 딸과 함께 새로운 꿈에 도전합니다"

27년째 키워온 '청바지 왕국' E&C 두 딸 이름에서 만들어 자체 브랜드 만드는게 목표 글렌데일에 '원 데님' 론칭 노루발 틈새로 재봉바늘이 쉼없이 오간다. 재봉틀 수 백대가 한꺼번에 만들어 내는 소리에 바로 옆 사람의 말도 잘 안 들릴 정도다. 그래도 배무한(67) 회장에게는 세상 그 어떤 소리보다도 정겹다. 여유가 조금 생길 때마다 한 대씩 두 대씩 늘려 온 기계들이다. 자식 같은 생각에 구매할 때마다 일련번호를 붙인 게 어느덧 1000번까지 왔다. 패션경기가 하락하면서 놀리던 재봉틀 320대를 최근 멕시코 티후아나 신공장으로 이전했지만 대부분 재봉틀은 LA공장에서 씽씽 돌아가고 있다. 귀에 거슬릴 법도 하지만 배 회장에게는 그저 천상의 화음일 뿐인 듯싶다. 서둘러 작업장을 둘러보는 그의 곁에는 장성한 두 딸이 있다. 뉴욕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하고 벌써 10년째 디자이너로 근무 중인 큰딸 엘리자베스(34)와 3년 전 유명로펌을 그만두고 합류한 작은딸 클라우디아(33)다. 클라우디아는 USC 비즈니스스쿨과 코넬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폴헤이스팅스에서 금융과 M&A 전문가로 활동하다 합류해 운영과 마케팅을 책임지고 있다. 두 딸은 나란히 부사장 직함을 달고 봉제.의류업체의 핵심 업무를 나눠 맡고 있다. 배 회장이 막 재봉이 끝난 청바지를 들어 보며 상태를 살피자, 두 딸의 시선도 한곳으로 쏠린다. 아버지가 알려주는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모습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있을 부모의 은퇴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배우려는 자세다. LA다운타운 올림픽 불러바드와 에스페란자 스트리트 코너, 한블록에 걸쳐있는 E&C 패션. 건물 규모만 12만 스퀘어피트다. 프리미엄 청바지 생산으로는 미국 최고 수준의 기술을 자랑하는 '청바지 왕국'이다. 10년의 남미생활을 정리하고 1988년 LA로 재이민한 배무한 회장 부부가 1990년부터 27년째 성공적으로 키워 온 봉제 및 패션기업이다. 트루릴리전, 디젤청바지, 애버크롬비&피치, 허드슨 진 등이 만들어졌거나 여전히 생산되고 있다. E&C패션은 원단커팅서비스로 출발했다. LA로 온 지 3년째 되던 해 창업했다. 일단 주문을 받으면 최상의 품질을 보장했고 철저하게 납기를 지킨다는 배 회장의 영업 스타일에 하청은 밀려들었다. 커팅서비스가 자리를 잡으면서 공장 한 쪽에 재봉틀을 들여 놓고 봉제공장 운영을 시작했다. 재단 능력과 디자인 감각이 좋은 아내(배정희씨) 덕이 컸다. 청바지 생산주문이 크게 늘었다. 사세를 키우면서 단순 봉제에만 머물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고가의 장비 구입에 과감한 투자를 했다. 청바지라면 재단부터 봉제, 염색, 워싱까지 원스톱 생산이 가능하도록 규모를 키웠다. 현재 E&C패션은 봉제작업을 전문으로 하고, 하청 수주는 아토믹데님, 염색과 워싱은 퍼시픽 콘셉트 론드리라는 계열사에서 분리.처리하고 있다. 이제 E&C패션은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세상 누구나 아는 자체 브랜드를 내놓는 것이다. 그 새로운 꿈에는 두 딸이 함께한다. 청바지 만드는 기술은 이미 세계 최고의 실력을 갖췄다. E&C 패션을 거쳐 간 고급 청바지 업체들만 이미 여러 곳이다. "비록 파산보호신청을 하긴 했지만 트루릴리전 신화가 E&C 패션에서 시작했다. 재단, 봉제, 염색, 워싱 등이 모두 E&C에서 이뤄졌는데 최고의 청바지라는 찬사를 받았다. E&C패션도 그런 프리미엄 브랜드를 가질 때가 됐다." 내 브랜드 갖기는 배 회장이 진작부터 공을 들여 온 분야다. 데님 오브 버추(Denim of Virtue)와 이메지네이션(imagination) 브랜드를 론칭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청바지 원청업체로부터 경쟁자로 인식되면서 생산주문이 끊기는 바람에 회사가 곤란에 처하기도 했다. "사실, 봉제업자나 의류도매상이나 내 브랜드를 갖는다는 것은 한결같은 희망이다. 하지만, 브랜드를 띄운다는 게 뜻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앞선 두 번의 실패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실력과 자본 그리고 마케팅의 삼박자가 유기적으로 움직여 줘야 한다." 그래도 배 회장의 세 번째 도전엔 자신감이 넘친다. 부부만 애태우던 예전과 다르기 때문이다. 디자인 경력이 이미 상당한 큰딸과 변호사로 운영과 마케팅을 총괄하는 작은딸이 든든히 돕고 있다. 그리고, 지난 12월 마침내 글렌데일 브랜드길의 아메카나몰 인근에 원 데님 1호 매장을 열었다. 온 가족이 힘을 모아 자신있게 내놓은 프리미엄진이다. 원 데님 매장에는 숍인 숍 형태의 '원데님 커피'도 판매한다. 밀레니얼을 타겟으로 한 원 데님은 맵시 있는 입을 거리와 분위기도 제공한다. 엘리자베스 부사장은 "매장에서 급하게 옷을 사는 시대는 지났다. 밀레니얼은 새로운 것을 찾아 경험하는 세대다. 커피를 즐기며 자신에 맞는 진을 스타일 할 수 있는 경험, 원 데님이 추구하는 콘셉트"라고 소개했다. 프리미엄급이지만 청바지 한 벌에 80~120달러 수준으로 젊은층의 주머니 사정도 고려했다. 반응도 좋은 편이다. 1호 매장 인테리어가 아직 온전히 꾸려지지 않았지만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와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인기를 얻고 있다. 배 회장은 "이번엔 조짐이 좋다. 두 딸이 함께하니, 힘도 난다. 멕시코 공장과 원 데님이 자리를 잡으면 우리 부부는 물러날 생각이다. E&C패션은 처음부터 엘리자베스와 클라우디아의 영문 첫 철자를 따서 지었다. 두 딸이 힘을 모아 '원 데님'을 키우며 더 큰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부모님과의 점심 가장 행복한 시간" 두 딸이 말하는 '직장생활' "작은딸 때문에 안 된다. 남들처럼 좀 슬쩍 넘어갈 수 있는 일도 변호사인 딸이 지켜보고 있으니 모든 게 원칙대로다." 배무한 회장은 최근 E&C패션이 유명 의류체인 갭과 캘빈클라인의 인스펙션을 모두 통과했다고 자랑하면서도 작은딸 클라우디아를 흘겨봤다. 원청업체들은 하청공장에서 생길 수 있는 노동법 문제를 예방하고자 작업장 상태는 물론이고 종업원들의 임금이나 상해보험(워컴)가입 등을 꼼꼼히 살펴 보는데, 규모가 큰 기업일 수록 검사가 까다롭다. "아, 글쎄 종업원 인터뷰만 100명 이상을 하더라고. LA에서 그런 정도의 인스펙션을 통과할 업체는 아마도 별로 없을 거라고." 아버지의 말에 미소만 짓고 있던 클라우디아 부사장은 LA봉제공장들 어려움은 정말 크다고 끼어들었다. 특히, 최저임금 인상과 높은 요율의 워컴이 인건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공장운영이 힘들다고 말했다. 배 회장이 최근 티후아나에 봉제공장을 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원 데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큰딸, 엘리자베스 부사장은 "브랜드 인지도가 조금씩 오르고 있어 다행"이라며 화제를 바꾼다. 배 회장은 "제작 비용이 비싸지만 '메이드 인 USA'의 메리트가 여전하기에 원 데님만큼은 LA에서 모든 작업을 진행하면서 품질 유지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배 회장 부녀는 잠시 티타임을 하는 자리에서 공장과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쉼없이 쏟아냈다. 동생보다 일찍 회사에 조인한 엘리자베스 부사장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디자이너로 입사했을 때는 종업원들의 리스펙트가 없었기 때문에 적응이 쉽지 않았다"며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클라우디아 부사장은 "무엇보다 부모님과 회사에서 점심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클라우디아 부사장은 6년 전 결혼을 했기에 부모와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애틋하다고 말했다. 김문호 기자 kim.moonho@koreadaily.com

2017-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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